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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회풍경   신앙상담 FAQ Ι 복음, 구원, 신앙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보세요!  
 
 
이단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오신 후에는 율법이 필요 없나요?>>> 교회만 다니면 천국에 갈 수 있나요?>>>
어떻게 하면 말씀에 이끌리는 신앙을 할 수 있을까요?

Q. 말씀을 들으면 ‘말씀이 맞다’ 하면서도 마음은 내 생각에 이끌려 갈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하면 말씀에 이끌리는 신앙을 할 수 있을까요?

A. 먼저 내 생각의 출처를 알아야 합니다. 내 생각은 항상 나를 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 생각을 따르면 망하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럴까요?
내가 나를 위하는 마음은 하나님이 나를 위한다는 사실을 불신할 때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생각은 정확히 불신 위에 형성된 것입니다. 성경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롬 8:6),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롬 8:7)고 말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 거할 때 사단이 인간에게 넣어준 생각이 바로 내 생각입니다. 다시 말해 내 생각의 출처는 사단입니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면 내 생각을 버리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말씀을 수없이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도 마음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는, 내 생각을 버리지 않고 그 생각을 그대로 가진 상태에서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면 내 생각, 곧 사단의 음성도 함께 들립니다. ‘이 생각 따라갔다가 내가 망하지 않았던가? 이젠 내 생각 안 따라가. 버리겠어!’ 하고 마음을 정하면, 그때부터 말씀이 그대로 마음에 자리 잡게 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편에 마음을 기울이면 말씀이 내 삶을 이끌어가는 복된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주기도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Q. 교회에 가면 일반적으로 예배 때 주기도문을 암송하는 시간을 갖는데, 주기도문의 정확한 의미를 알고 싶습니다.

A. 예수님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외식적이고 중언부언하는 기도의 태도를 질타하셨습니다. 그처럼 사람들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도 그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달라집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는 죄를 사해주실 것에 대한 약속이지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에는 죄를 사해주신 은혜를 증거합니다. 구절구절(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나님이 약속하신 구원을 이루실 것에 대한 간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친히 십자가를 지시므로 속죄함을 다 이루셨고(요 19:3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하나님은 우리 죄와 불법을 다시 기억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히 10:17)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는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셨고, 믿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했습니다.(막 16:15~16)
만약 여러분의 아들이 자전거를 사달라고 했을 때 여러분이 “다음에 사 줄게.”라고 하다가 어느 날 자전거를 사 주었다고 합시다. 그런데 아들이 또 “자전거 사 주세요.”라고 한다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자전거를 사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옳습니다.
구약시대 사람들이 “하나님, 죄를 사해주십시오.”라고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조금만 기다려라. 내 아들 예수를 보내서 너희 죄를 다 씻어줄게.” 하고 약속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은 구원에 대한 약속입니다. 그 후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의 피로 우리 모든 죄를 끝내시고 다시 죄를 위해 제사드릴 것이 없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든 죄를 영원히, 완벽하게 씻어주셨기에 “감사합니다.”라고 해야 맞습니다. 만일 이런 의미도 모르고 아직도 죄를 사해달라고 기도(주기도문)를 드린다면 그것은 주님의 속죄함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했다고(고전 2:2) 했고 성경 어디에도 제자들이 모여서 주기도문을 외웠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구원은 어떻게 받는 건가요?

Q.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며 신앙생활을 했지만 솔직히 구원의 확신이 없어요. 구원은 어떻게 받는 건가요?

A. 많은 사람들은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봉사하고, 새벽기도하고, 경건하게 살아야 구원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합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가 아무것도 한 것이 없었지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면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내 행위와 상관없이 주님이 하신 일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어느 날 디엘 무디 목사가 설교를 마치고 내려오는데 어느 부인이 “목사님, 제가 어떻게 해야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부인, 한발 늦었습니다. 이미 예수님께서 부인이 구원받을 수 있도록 다 해놓으셨기 때문에 부인이 해야 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구원을 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일을 그대로 믿으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완벽하게 이루신 구원을 믿지 않고 여전히 내가 구원받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10:3) 우리의 선한 행실이 아니라 내 죄를 예수님께서 어떻게 눈처럼 희게 씻어 놓으셨는지를 듣고 그 말씀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겁니다.

회개기도를 열심히 해도 마음에 죄가 남아있는 것 같아요.

Q. 회개기도를 열심히 해 봐도 마음에는 여전히 죄가 그대로 남아있는 것 같아 괴로운데, 왜 그런지 궁금합니다.

A. 많은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기 위해서 열심히 회개기도를 하는데, 기도가 우리의 죄를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의 죄를 씻어 주는 것입니다. “율법을 좇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는 말씀처럼 죄에 대해서 그 값이 지불되지 않으면 죄가 씻어질 수 없습니다.세상의 법에는 죗값의 종류가 사형, 무기징역, 벌금 등 다양하지만 성경에서는 단 하나 ‘사망’뿐입니다. 그래서 사망이라는 죄의 값을 지불하지 않고서는 죄 사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기도는 그냥 기도일 뿐이지 죗값이 아닙니다. 열심히 기도한다고 해서 죄가 씻겨 지는 게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만약 기도해서 우리 죄가 씻겨 진다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실 필요가 없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피 외에는 그 어떤 방법으로도 죄를 사함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피 흘려 돌아가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는데, 이 사실을 모르고 회개기도만 하니까 마음에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가 씻어진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하다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Q.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충성을 다해 열심히 봉사를 하다 보면 좋을 때도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쳐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베드로의 경우를 살펴보면 베드로가 자기의 경험과 실력에 의지했을 때는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온 후 그 말씀에 의지해 그물을 내렸을 때는 배 두 척이 물에 잠길 만큼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해 왔던 베드로의 방법이 아닌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를 이끌어 간 결과입니다.
그 후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해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었고,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다니면서 자신이 굉장히 복음을 위해 사는 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베드로가 결국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는 배반자가 되어 신앙에서 완전히 실패하고 맙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베드로의 마음에 들어와서 그 말씀이 능력이 되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인데, 베드로는 자신이 배와 고기와 그물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 안에 들어와서 그 마음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을 베드로는 몰랐던 것입니다. 사단은 “충성하고 봉사하고 열심을 다하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을 것”이라며 오랫동안 우리를 속여 왔습니다. 인간이 열심을 다하여 봉사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잘 되려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인간이 항상 악하다(창 6:5)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을꼬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사66:1) 하나님은 악한 인간이 한 것으로는 어떤 것도 받으실 수 없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것입니다. 신앙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님을 대적하고 배반하는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온전히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것입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응답을 받지 못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Q. 신앙생활을 하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했지만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할 때가 있는데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할까요?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A. 기도는 응답을 전제로 하는 것이고, 믿음이 함께할 때에 응답이 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는 말씀처럼 병을 낫게 해 달라고 마음으로 기도했다면, 나은 걸 보고 믿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형편은 아직 병에서 낫지 않았지만 다 나은 줄로 믿으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형편과 상관없이 마음에서는 이미 병이 다 나았다는 걸 믿으라는 겁니다. 다 나은 걸로 믿고 받아들이면, 결국에 다 나은 형편이 따라온다는 겁니다.
더욱 더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의 한 부부가 결혼한 지 9년이 되었는데도 아이를 낳지 못했는데, 이야기를 해 보니 하나님이 아이를 주실 것에 대한 믿음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신앙상담을 하게 되었는데, 신앙상담을 통해 하나님과 막힌 그 부부의 마음이 말씀으로 열렸습니다.
“잉태하지 못하던 여자로 집에 거하게 하사 자녀의 즐거운 어미가 되게 하시는도다(시 113:9)”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얼마 안 되어 부인이 임신을 하여 아이를 낳았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고 했습니다. 냉정하게 말해, 믿음이 빠진 기도는 넋두리나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를 이루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됩니다.

집안 경제사정이 나빠져 헌금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럽습니다.

Q. 그동안 많은 헌금을 드렸지만 요즈음 집안 경제사정이 나빠져 헌금하는 것이 많이 부담스러운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지금까지 어떤 마음으로 연보를 해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내 것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헌금한다는 마음으로 연보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내 삶의 전부가 주님으로 말미암은 것이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드리기도 합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하나님께 많은 연보를 드렸는데, 역대상 29장 14절에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헌금이 부담스러운 것은 내 것으로 주님께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6장 10절에는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부요한 자이고 모든 것을 가진 자인 것입니다.
내가 내 형편 안에서 연보하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주님의 부요함 안에서 주님께로부터 오는 물질을 드리게 된다면 정말 축복된 연보가 될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제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괴롭습니다.

Q. 저는 교회에 다니지만 오히려 다니지 않는 사람보다 더 악한 제 모습을 볼 때마다 정말 괴롭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A.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지 못하게 하려고, 자기 속에 있는 악한 모습을 보게 해서 자기가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게 합니다.
우리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육체라는 ‘자신’과 싸우고 있는 동안 사단의 계획대로 우리 마음은 하나님과 멀어지게 됩니다. ‘나’라는 인생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떠나 죄악으로 오염되었기에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 등 모든 것이 다 잘못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 자신을 불신하고,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려진 나의 모습을 참된 나로 여겨야 하나님이 우리 속에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창세기 27장의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형 에서에게로 가는 복을 받기 위해 자기 생각을 버리고 어머니(리브가)의 말씀을 받아 이삭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 자신의 모습이나 생각을 버리고 기록된 말씀을 참된 것으로 받아들일 때,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복을 받기에 충분하도록 우리의 마음과 삶을 이끌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데 이해가 잘 안 가요.

Q.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데 전 이해가 잘 안가요. 하나님에 대해 좀 자세히 설명해 주세요.

A. 하나님은 영(靈)이시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을 믿을 만한 분명하고 확실한 증거들을 주셨습니다.
옛날에는 사람들이 전기(電氣)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지금도 우리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전기를 사용해서 전등을 켜거나 텔레비전을 시청하고, 컴퓨터를 이용하는 등 전기가 하는 일을 통해 전기의 존재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지으신 만물 속에 당신의 존재와 능력을 분명히 나타내셨습니다. 그건 마치 발명품을 보면 발명가의 존재와 능력을 알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만물 속에 나타난 질서가 하나님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태양계는 어떤 시계보다 정교한 시계와 같고, 지구는 약 60억 명의 승객을 태우고 태양의 주위를 항해하는 완벽한 우주선과 같습니다. 정교한 시계 나 우주선이 우연히 저절로 만들어질 수 없는 것같이 발명품이 있으면 발명가가 있는 건 당연한 사실 아니겠습니까?
“집마다 지은 이가 있으니 만물을 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히 3:4)
아울러 성경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정확하게 배우고 알면 하나님을 믿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처럼 놀랍고 신비한 책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 중 한 예로,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사실들만 확인해 봐도 성경은 우리의 미래까지 정확하게 아시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대한 예고,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예언, 이 세상 세상 의 마지막 때나 어떤 국가, 개인에 대한 예언들이 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을 보면 “과연 하나님이구나!”라고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는 성경을 통해 세상 의 미래를 정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마음에 있는 죄를 사함 받고 영적 세계를 볼 수 있는 눈이 떠지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의문은 깨끗이 사라지고 믿음 안에서 참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됩니다.

자매님의 말과 행동이 상처를 줘서 교회까지 나가기 싫어 고민입니다.

Q. 같은 교회에 다니는 자매님의 말과 행동이 저에게 깊은 상처를 주고 있어요. 그동안은 참고 넘어갔지만 이제는 교회까지 나가기 싫어 고민입니다.

A. 성경은 우리의 마음 안에 우리가 원하는 선(善)이나 사랑은 없고 오히려 원치 않는 미움, 탐심, 악(惡)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 나 자신을 모른 채 나의 선한 모양과 좋아 보이는 것으로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하려고 하면 결국 한계를 만나 시험에 빠지게 되고, 그 신앙은 무너지게 됩니다. 우리는 근본 마음이 악하고 더럽고 추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사랑하거나 이해할 수 있는 마음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을 미워하고 용납할 수 없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 더러운 내 마음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여 예수님의 마음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은 형제자매가 일흔 번씩 일곱 번 죄를 범할지라도 여전히 그 형제자매를 사랑하고 용납하고 받아줄 수 있는 마음입니다. 성경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 2:5)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받아들일 때 다른 사람과의 갈등에서 해방을 받아 마음에서 자유와 평안,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Q. 성경을 읽다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어렵게만 느껴지는데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그 뜻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요?

A. 이사야 29장에는 성경을 ‘봉한 책’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의 영(靈)으로는 단지 성경의 내용은 이해할 수 있어도 그 속에 담겨진 하나님의 마음은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고전 2:10)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그 영이 하나님의 세계를 이해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들어오기 전에는 공중의 권세 잡은 자인 사단이 인간을 지배하여 인간에게 혼미한 마음을 넣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닌 자기 나름대로의 선악의 판단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이 ‘죄인의 삶’입니다.
예수님이 이루어 놓으신 십자가의 구속의 복음을 마음에 받아들이면 우리의 마음이 죄와 사단에게서 벗어남으로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죄인의 삶에서 벗어나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성경 속에 있는 주님의 마음을 가르쳐 줍니다.
얼핏 보면 누구나 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이해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는 없습니다. 구원받아 성령을 우리 마음에 받아야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로 말미암아 비밀스럽게 감춰진 성경 전체가 이해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지 못한 경우가 많아 고민입니다.

Q.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범적인 삶을 살고 싶은데 막상 제 모습을 보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 고민입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A.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구원받기 전과 구원받은 후의 육신의 소욕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각오하고 결심한다 할지라도 우리의 옛 행동과 습성에서 변화될 수 없습니다. 처음에는 기대를 하며 좋은 마음으로 시작하지만 얼마 못 가 처음의 각오와 결심이 오히려 우리 마음에 부담을 주어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잘해야 한다는 법과 기준을 세우게 되면 마음에 부담이 커져 오히려 행동에 제약을 가져옵니다. 그러다보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아 보이는 것만 하고 싶은데, 도리어 원치 않는 것만 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거룩함의 수준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는 나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자신이 온전할 수 없는 자임을 깊이 알면 알수록, 자신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의 노력으로 나를 변케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알 때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변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즉, 나 자신이 죄를 이기지 못하는 것은 사단이 방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주 예수의 보혈로 우리의 그 더러운 모습에서 자유하게 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잘못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능력을 가지신 하나님께 나오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착하게 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가길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 가운데서 벗어나게 하지 아니하시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면 나의 삶을 당신의 능력으로 이끌어 주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 연약함이 예수님을 찾게 되는 계기가 되고, 이러한 나를 받아주셨다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합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점점 신앙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Q. 나름대로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신앙이 어렵게 느껴집니다. 참된 신앙은 쉽다고 하는데 알고 싶습니다.

A. ‘참된 신앙’은 회개와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자신의 열심과 노력으로 신앙생활을 잘해 보려고 애를 쓰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를 거듭하며 신앙에 대한 회의를 가지거나 자포자기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신앙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며 내가 할 수도 없고 안되므로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대신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후사가 되는 이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롬 4:1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 뒤에는 항상 온전한 은혜가 뒷받침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할 수 없기 때문에 전적으로 하나님이 대신해 놓으신 은혜 말입니다. 이런 믿음의 비밀을 모른 채 자기 행위와 자기 열심 속에 빠져서 고통당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입니다. 회개와 믿음을 통한, 쉽고 기쁘고 감사한 신앙의 길로 인도 받지 못한 채 내가 무엇을 해야 된다는 행위 속에서 고통당하다가 마침내 영원한 저주와 멸망을 당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이겠습니까?
그런데 대부분 이런 경우는 정확한 복음의 진리가 없는 거짓교회와 거짓목회자들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입니다.

거짓교회와 거짓목회자를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Q. 주위 교회는 많지만 참된 교회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거짓교회와 거짓목회자를 분별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지요?

A. 예수님께서 “거짓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마 7:15~16)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수많은 목회자들이 외형적인 모양은 경건하고 신령하게 보이나, 이리가 양을 낳을 수 없듯이 거룩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녀로 거듭나도록 인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회개하세요, 열심을 내세요, 충성하세요, 봉사하세요”라는 등 막연하게 행위를 강요하는 소리를 늘어놓지만 거듭날 수 있는 분명한 말씀은 전해주질 못합니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은 내시가 참된 믿음을 찾아 갈급한 마음으로 예루살렘까지 왔지만 예루살렘에 있는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인도해 주질 못했습니다.(행 8장)
에티오피아 내시가 전도자 빌립을 만나 비로소 거듭난 것처럼, 오랜 세월 신앙생활을 해 왔다 하더라도 자신이 정확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다면 올바른 인도자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거짓목회자들은 영혼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이 없으며 그 마음의 중심이 세상에 있고 자기를 위한 삶 속에 빠져있습니다.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마치 상인들이 거래하는 상품의 하나로 여기는 자들과 같이, (계 18:13) 오늘날 신도들을 포함한 교회를 매매하는 등 성경에서 말씀하신 타락한 거짓종교지도자들의 모습은 이제 우리 주위에 정말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 되었습니다.
내가 정확히 거듭난 구원의 믿음을 가진 신앙생활을 하는지, 내가 속해 있는 교회와 인도자는 믿음의 삶으로 인도해 주는지 냉정하게 돌아보시고, 아직 그렇지 못한 가운데 있다면 정확한 말씀으로 인도해 줄 수 있는 교회와 종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일부 내용에서는 왜 선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Q.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항상 악하여 선을 행할 수 없다고 하셨는데,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는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을 봅니다. 왜 그런지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A. 모든 사람에게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좋아하는 본성이 있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릴 적부터 선하게 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선을 행하려는 성향이 있고, 생활 속에서도 ‘선을 권하고 악을 배척하는 사상’이 자연스럽게 스며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개개인의 마음 속에 형성되어 있는 선악의 판단 기준이 시대, 민족, 지역, 성장 과정 등 여러 환경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처럼 자주 변하는 것은 정확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선악의 참된 기준은 변치 않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찾아야 됩니다. ‘악’에 대한 성경 말씀을 찾아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렘 2:19)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즉, 사람의 마음에는 악한 생각들로 가득 차 있어 어느 누구도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실을 율법을 통해 증명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그 음성을 따라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그 땅에 기근이 심하게 들자 곧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 채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는, 마음에 육신의 욕망이 일어나자 자기에게 돌아올 분깃을 가지고 아버지를 떠나는 둘째 아들에 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처럼 성경에는 하나님을 버리고 떠나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항상 악한 인간 하나님은 이러한 말씀들을 통해 우리 역시 언제든지 하나님을 떠날 수 있는 악한 자인 것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우리도 생활 속에서 얼마나 자주 하나님을 저버립니까? “탐심을 품지 말라.”는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좋은 것을 보면 늘 탐심을 품음으로 하나님의 법을 저버립니다. “분을 내지 말라.”는 말씀을 알면서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절제하지 못한 채 곧 화를 내는 것을 봅니다. 그런 우리들이기에, 하나님은 우리 근본이 ‘행악의 종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감 종자를 땅에 심으면 나중에 감이 열리고, 포도 종자를 땅에 심으면 포도가 열리듯,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행악의 종자로 태어났기에 항상 악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한번은 평생 김밥을 말아 번 돈 50억 원을 어느 학교에 희사(喜捨)한 70대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뉴스거리가 된 적이 있습니다. 김밥 50억 원어치의 분량이라면 정말 막대한 것입니다. 따져 보면 그 할머니의 인생 전부를 희사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아마 그 할머니를 보고 악하다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보시지 않습니다. 학교에 희사한 50억 원은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욥 35:8)이라고 하십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그러하시듯 그 할머니 역시 악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외모밖에 볼 수 없는 사람과 달리 마음의 중심까지 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하다’(렘 17:9)고 하셨으며, 악한 생각 곧 음란, 도적질, 살인, 간음, 탐욕, 악독, 속임, 음탕,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 등으로 가득차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할머니의 마음에도 동일하게 이런 악한 것들이 가득차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보면, 어떤 관원이 예수님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고 하시면서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킬 수 없는 자신의 악한 근본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도 많은 선을 행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더 많은 선을 행해서 영생을 얻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네가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쫓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가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악한 자임을 가르쳐 주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그는 더 이상 자신의 의를 나타낼 수 없었고, 결국 재물을 더 사랑하였기에 심히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났습니다. 그 이야기 앞에는, 바리새인과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바리새인은 따로 서서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면서 자신을 세리보다 더 의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했습니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 악한 죄인인 것을 고백하면서 긍휼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리의 기도를 기뻐하셨고 바리새인보다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세리의 기도처럼 우리 인간은 항상 악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행하는 선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선을 행하라고 하셨을까요? 항상 악한 우리가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구스인이 그 피부를, 표범이 그 반점을 변할 수 없는 것’(렘 13:23)처럼 악에 익숙한 우리 역시 선을 행할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에게서는 어떤 선한 것도 요구하실 수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우리를 죄악 가운데 내버려두셨고, 그 더러움 속에서 우리가 자신의 악을 깨닫고 당신에게로 마음을 돌이키기를 원하십니다. 그때 당신이 예비해 놓으신 의를 주시는데, 그 의를 가지고 우리가 선을 행하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미가서를 통해 우리에게 요구하신 ‘선한 것’을 보이셨습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위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6~8)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악한 우리에게 요구하신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한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즉, 죄로 말미암아 멀어진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화목케 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담당시키신 후 우리 대신 십자가에 죽게 하셨습니다. 그로 인해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당신의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기쁨으로 같이 동행하기를 원하십니다.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인다면 마음이 바뀌고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선을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부인하기도 했던 베드로 역시 그 사랑을 경험한 뒤로 달라졌음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유월절을 예비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주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겠나이다.”라고 맹세했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때 베드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성경은 그가 심히 통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는 자신이 미웠을 것입니다. 그는 처음으로 자신의 악한 모습을 깊이 본 것입니다.
그 후 예수님은 부활하셨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정죄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부활 후 세 번째 나타나셨을 때에는 제자들과 같이 조반을 먹은 후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습니다.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님을 부인했던 베드로가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자기의 모습과 상관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악한 모습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예수님을 참으로 사랑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두 번이나 더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는데, 베드로는 여전히 “주여, 그러하외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행위로 자랑할 것이 없었던 것처럼, 베드로 역시 자신의 행위를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을 자랑할 뿐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했고, 하나님의 의를 힘있게 나타냈습니다. 베드로처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우리 자신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빛을 발하지는 못하지만 태양의 빛을 받아 빛나는 달처럼, 우리 스스로는 선을 행하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비친 사람들만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선을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의 행위로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믿는 믿음으로 선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행하는 선은, 복음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믿음으로 받아 나타나는 하나님의 선인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다른 교회에서 이미 구원 받은 것을 인정하시는지요?

Q. 많은 사람들이 다른 교회에서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을 인정하고 확신을 하고 있는데도, 그 구원에 대해서 귀 교회는 인정을 하시는지요?

A. 다른 교회에서의 구원을 박 형제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 드립니다.
형제님의 글에 대한 회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사실 전에도 여러 번 그런 질문을 받곤 해서 꼭 회답을 쓰고 싶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참 많은 교파와 교회가 있는데, 그 모든 교회가 저마다 자기 교회가 옳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느 교회가 참 교회냐?’ 하는 문제입니다. 사실 모든 교회가 처음에는 한 교회, 즉 예수님으로 시작된 교회인 것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 교회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세속화되고 타락해지면서 구원의 선이 점점 흐려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장로교회나 감리 교회 등 여러 기성 교회들이 처음에 시작할 때는 참으로 복음 안에서 진실하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세속화되면서 구원이 흐려졌고, 구원의 선이 애매해지면서 교회 안에 구원 받은 사람과 구원 받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구분이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분명한 구원의 선이 없이 그냥 교회에 나오면 다 구원을 받은 사람으로 인정해 주니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에서 빛 된 삶을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한, 구원을 받았다고 해도 영적으로 흐린 사람들은 구원을 잘 분별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기준도 상당히 다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나에게도 참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원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구원을 이론으로는 잘 알고 있으나 마음에는 전혀 믿음으로 이루어 지지 않아 성령이 전혀 그 마음 속에 역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라도 마음에 확실히 구원이 이루어지면 마음에 쉼이 오고 또 성령이 그 마음 속에서 일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에 대한 지식은 알지만 마음에 믿음으로 임하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영광을 가리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볍게 사람들에 대해 구원받았다는 말을 하기를 조심하며, 신중히 영적 상태를 분별해서 구원을 받지 않았거나 애매한 사람을 구원 받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영혼은 천하보다 더 귀합니다. 그렇기에 구원이 확실치 않은 사람을 그냥 구원받았다고 해서 그 영혼이 구원 받을 기회를 잃고 지옥에 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 되겠습니까? 형제님도 다른 사람들에 대해 쉽게 구원을 인정하기 전에 먼저 정확히 분별하기를 바랍니다. 나는 형제님이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어 구원의 복음을 잘 전할 뿐 아니라 잘 분별도 해서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귀한 일꾼이 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